[동국안문]은 볼 지어다!

[동국안문]이라는 [이굴루] 창에 벼라별 자료를 써 놓아도

죽산안씨는 그 시조라고 스스로 붙인 濬. 令儀로 각각의 竹山安씨임은

부정할 수 없음을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동국안문]을 운영하는 사람은 영의를 시조로하는 죽산안씨다.

[동국안문]이라는 사람이 아직도 안씨들을 농락하고 있는 증거! 죽산안씨(구) 족보관련자료.

安浩相이라는 사람이 1982년에 發議文이라는 怪常한 문건을 만들어

본관이 다른 安씨들에게 주소. 성명. 서명(印)을 받아 헛짓을 한 것은

역시. 거짓족보(僞譜)를 만들어 [족보장사]를 하려는 수작이고,

어찌 다른 각각의 安씨들의 始祖를 욕보이려 한다는 말인가?

특히, 安均燮(순흥안씨)는 지금도 순흥안씨 문중에서

신죽산. 탐진안씨를 끼워붙인 족보(순흥안씨)를 만들었다고

그 순흥안씨 문중에서 지탄(指彈)을 받고 있다!.

족보장사를 해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이 증거된다!

安浩相이라는 사람도 역시 末年에 [족보장사]를 해 볼 욕심이 생긴듯 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게시하다가 삭제한 중요한 [성씨의 역사] 성씨 역사




2014. 12. 13.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핵심인 한국학 분야의 [한국의 인물정보]에서 [5개의 안씨(安씨)를 소개하는 성씨의 역사]는 아래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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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1.(구)의 성씨역사.
[성씨의 역사]

오늘날 죽산안씨의 시조로 알려지는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 종실(宗室)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인 이원(李瑗)의 장남 이지춘(李枝春)이라고 한다. 그는 864(경문왕 4)에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 형제와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왕이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는 뜻에서 안씨(安氏) 성을 받았으며, 이 때에 안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고 1999년에 편찬된 죽산안씨대동보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당서 70권의 당나라 종실 세계에는 이국정의 아들 중에 이원이라는 인물이 없다.
따라서 이국정 - 이원 - 이지춘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근거있다고 보기기 힘들다.

 

중국에서 온 3형제에서 안씨가 연원했다는 주장이 나오기 이전까지, 씨족원류 등의 문헌에서 죽산안씨의 맨 윗대로 언급되는 사람은 안준(安濬)과 안영의(安令儀)이다. 이 두 사람은 계보가 다른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의 선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참고문헌]
唐書(70上 宗室世系上. 78 열전제3종실. 224上 叛臣上)
資治通鑑(권제237 唐紀 53)
죽산안씨족보(1965년 이전)
죽산안씨대동보(1999)
씨족원류
 
[집필자]
오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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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2(신죽산안씨) 시조

성씨의 역사

시조는 안원형(安元衡)으로 알려진다.
안원형은 고려 후기의 인물로 전해지는데, 관련 기록은 많지 않다.

우선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회양부사안후묘갈(淮陽府使安侯墓碣)이 있는데 여기에는

“공의 이름은 안복초(安復初)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아버지는 안노생(安魯生), 할아버지는

안면(安勉), 증조는 중대광(大匡輔) 광산군(光山君) 안원형(安元衡)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과거 급제자 기록을 정리한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에는 “죽산안씨

안노생(安魯生)의 아버지는 안면(安勉)이고 조부는 안원형(安元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소가 지은 안복초의 묘갈과 고려열조등과록의 안노생 급제 기록에 나타난 안원형과 그 후대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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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안씨의 시조

성씨의 역사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시조는 안원린(安元璘)으로,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으며, 이런 연유로 후손들이 탐진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 부분은 더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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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  
성씨의 역사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따라서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로 순흥현(順興縣)에 세거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2,3파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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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廣州安씨):

성씨의 역사


광주안씨(廣州安氏) 시조는 안방걸(安邦傑)이며 고려 태조 때 광주지방(廣州地方)의 관리로 뛰어났던 분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으므로 그 공적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해져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 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후에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土姓分定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안씨(安氏) 성(姓)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구)죽산안씨의 거짓족보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게시하였다. 죽산안씨(구) 족보관련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구)죽산안씨. 순흥안씨. (신)죽산안씨 등이 시조의 기록을 두고, 갈등하는 행태에 엄정하게 대하지못하고, 모-든 성씨의 시조의 연원(淵源)을 삭제하여 [성씨본관사전]을 훼손하여  한국학분야를 스스로 부족하게 하였음을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을 보여주었으므로, 그 피해를 당하는 광주안씨 사람으로 (구)죽산안씨의 족보를 고찰하여 그 실상을 다시 밝히고자 여기에 기타의견으로 게시하는 것입니다.

 

아래는 (구)죽산안씨 족보(1976.1999 대동보)의 진위(眞僞)를 고증한 글임.

개요.

종래의 두 竹山 安씨(구죽산 안씨. 安濬 또는 安漢平을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 安令儀를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가

濬계는 최초족보를 1744년,1804, 1922,,1960년에 간행하고 일관되게 濬(고려 중기.少府少監)을 始祖로.

令儀계는 최초족보를 1805년,1848,1858, 1893,1949,1965년에 간행하며 역시 令儀(고려 중기.尙書左僕射)를

始祖로.

각각 竹山安씨로 살아온 성씨문중으로 그 족보와 각종 系譜書와 그 후손들의 墓碑文.行狀 등에도 분명하다.
 

그런데 1976년에 중국의 롱서이씨(隴西 李氏) 이원(李瑗)이라는 唐나라사람이 東쪽 松嶽山(開城 송악산)아래로

건너와 신라 경문왕때 왜란(倭亂)을 평정한 공으로 성(姓)을 安씨로 받고 그 아들 李枝春이 安邦俊으로 이름을

바꾸어 始祖가 되고 竹山君이라면서 濬계와 令儀계 두 죽산안씨가 하나로 합쳐 족보(合譜)로 [竹山安氏大同譜]를

만들어 하나의 죽산안씨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원(李瑗)의 세 아들(李枝春. 李葉春. 李花春)도 각각 安邦傑. 安邦俠으로 그 아들 3형제가 성(姓)을 받고,
이름을 바꾸어 한국의 모든 안씨(安氏)들의 始祖라고 하고, 廣州安씨 시조인 安邦傑과 10대까지.또 順興安씨

시조 子美를 광주안씨 10대 후손으로 系代를 써놓았으니 광주안씨. 순흥안씨가 모두 죽산안씨와 같은 계통(系統)

으로 그 족보에 기록하여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安씨의 성씨근원(姓氏根源)을 모독하고 있다.  

 
이어서 불과 22년만인(통상 30년주기로 족보를 간행하는데) 1999년에 다시 대동보를 만들면서 이원(李瑗)이

중국 당나라(唐)의 종실사람(宗室人.당나라를 세운 唐 高祖 李淵의 일가붙이)라고 신분을 바꾸고,

역시 같은 시조로 [竹山安氏大同譜]를 만들었다.
 

 

 

이에 姓氏의 출자(出自)와 근원(根源)에 한 점 관련없는 광주안씨(廣州 安氏)시조와 계대를 죽산안씨에

끼워붙여놓아 시조를 모독하고 전체 후손의 씨족 정체성을 부정. 모욕하는 사실에,

죽산안씨 족보와 그 씨족관련한 역사사실을 고증(考證)하고 최근 족보(1976.1999 대동보)가 거짓임을 밝힌다.

 

★. 고찰한 근거문헌.

     가. 죽산 안씨 족보: 1976(丙辰)죽산안씨대동보. 1999(己卯)죽산안씨대동보.

                                 1917(丁巳)죽산안씨세보. 1923(癸亥)죽산안씨세보.

     나. 역사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사. 동사강목. 신당서. 자치통감.

     다. 죽산안씨측 자료: 안씨원류(죽산안씨대종회.‘05.8.27.)

                                  죽산안씨대종회보 7.8.10호(‘00.3월.’00.12월.‘05.5월)

                                  죽산안씨측이 주장하는 고증자료(‘07.4.8.죽산안씨 대종회장 안국승씨 제공).

     라. 성씨종합계보서: 씨족원류(조종운.1680년찬). 조선씨족통보(윤창현.1924년)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한국족보대전. 성씨의 고향.

     마. 백과류서(百科類書): 대동운부군옥(권문해.1589년찬). 증보문헌비고(1908).


 1. 죽산 안씨 시조의 선계와 시조라는 인물은 날조한 가공인물이다.

    
    가.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先系)라는 이원(李瑗)이 농서(隴西)이씨(李氏)로 당나라(唐) 종실사람(宗室人)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는데,

         이국정의 아들은 이기(李錡). 이일(李鎰). 이풍기(李豊器). 이풍사(李豊士) 로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국정이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에 이국정의 진중에 군량이 없다고 수하장수 왕진(王振)에게 당 보응 원년

        (唐 寶應 元年.762)에 죽임을 당할때 두 아들 (풍기. 풍사)도 같이 죽었다..

        (乙丑,河中軍亂,殺李國貞及其節度使荔非元禮:신당서 기록)

         이국정의 큰 아들 이기(李錡)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로 당 헌종(憲宗)황제에 항거한 죄로 元和2년(807.

         丁亥).11월 11일에 당나라 도성인 장안(長安) 흥안문 성밖에서 그의 아들 이사회(李師回)와 함께 허리를

         꺾어죽이는(腰斬)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이기의 나이 67세 때다.(李锜,淄川王孝同五世孫。

         以父國貞蔭調鳳翔府參軍. 

        (帝曰:「爾以宗臣為節度使,不能斬子良然後入朝邪?」锜不能對。以其日與子師回腰斬於城西南,年六十七。

         屍數日,帝出黃衣二襲,葬以庶人禮。:신당서 叛臣上)

         이국정의 둘째 아들 이일(李鎰)은 이국정과 그 윗대 선조인 신통(회안정왕 神通)이 당나라의 개국공신이라

         제사를 받들도록 용서를 받았다.

          ※.新唐書: 열전 제3.宗室. 열전 제149上. 叛臣 上. 자치통감: 唐紀53. 참조.

     나. 죽산안씨대동보(1999년)에 그 시조의 아버지가 이원(李瑗)이고 아우는 이황(李璜)인데 두 사람은 당나라

          종실사람 이국정의 아들이라 하는데 당나라 종실세계(宗室世系)에 없는 사람을 날조(捺造)한 것이다.

          ※.신당서 卷70 上. 表제10上. 宗室世系 上. 참조.

     다. 이황(李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시조이고. 고려 덕종(1033). 문종(1063)때 사람으로 당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고려사 권5. 세가5. 고려사권8. 세가8. 고성 이씨 족보. 참조.

     라. 이원이 당나라 종실사람도 아닐뿐더러 가공인물이니 그의 세 아들이 있다는 것은 날조한 것이다.

 

 2.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와서 전공(戰功)이 있고 安씨가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가. 이원. 이황이 당 헌종 원화2년(丁亥.807)에 동쪽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 송악산 아래에 살았다는데,

         가공인물이 어찌 올 수가 있는가?
         807년에는 당나라 종실사람 이기가 처형을 받아 죽은 해다.

    나. 이원과 이황이 광주(廣州)사람이 그 성주를 죽이는 민란이 일어난 것을 토평하는 전공으로 신라 국왕이

         이원에게 안씨(安氏)姓을 주고 이황은 이씨 성을 갖게 하고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했다면서 그 근거로,

         신라 헌덕왕 7년(815)의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된 지역은 서쪽 변두리지역이니 開城이나 광주(廣州)가

         아닐뿐더러 이원이나 이황이 평정했다는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7년조 .참조.

    다. 헌덕왕14년(822)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기록을 이용하여 이원 이황이 전공(戰功)이 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지역은 지금의 공주(公州)지역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이었고 당시 한산(漢山.)은 지금 광주(廣州)로 스스로 지켰고,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의 인물기록

         등이 자세하여 이원이나 이황은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 14년조. 참조.

    라. 또, 헌덕왕 때에 백성에게 姓을 주었다는 기록과. 봉군(封君)한 사실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없다.


3. 이원의 세 아들이 전공(戰功)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改名), 봉군(封君)받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가. 신라 경문왕 4년(甲申.864)갑신왜란(甲申倭亂)에 왜구를 소탕한 공으로 이원의 세 아들이라는 지춘(枝春)은

        방준(邦俊).엽춘(葉春)은 방걸(邦傑).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이름을 바꾸고.죽산군(竹山君).광주군

        (廣州 君). 죽성군(竹城 君)으로 봉군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4년에 왜란이 없으며, 경문왕 재위14년 동안에도 왜란이 없었으며. 당시에 죽산.광주.죽성

        이라는 지명(地名)이 없었고, 일반 백성에게 봉군(封君)하는 일이 없었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문왕 4년조 내지 경문왕조 전부. 참조.

   나. 앞서 고증한 대로 중국 당나라 종실사람이라는 이원이 없으니 그 자식이라는 세 사람도 허구인물이다.

   다. 신라 때 성을 왕이 준(賜姓)일은 신문왕 3년(683)에 보덕왕 안승(安勝)에게 김씨(金씨)를 준 일.

        애장왕 6년(805)에 왕의 어머니를 숙씨(叔씨)로 당 나라가 준 일. 이외에는 없다.

   라. 죽산 안씨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빙자하나 1908년 당시에 떠돌던 항간의 낭설을 기록한 것일 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없으니 거짓이다.

   마. 특히, 광주 안씨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출자(出自)와 성씨연원(姓氏淵源)을 모방(模倣)하고 도용(盜用)하여

        거짓족보(僞譜)를 만든 것이다.


4. 종전(1976년 이전)에는 죽산 안씨는 두 문중으로 시조가 濬. 令儀로 각각이고. 족보가 따로 있다.

     
    가.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는 준(濬. 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두 죽산안씨 문중은 1744년.1805년에 각각 처음 족보를 간행하며 분명하게 따로 계대를 이어왔음이

         그들의 족보 기록과 각종 성씨계보 문헌에 확실하 다.

         ※.죽산안씨세보(1917.1923.). 씨족원류. 대동운부군옥.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참조.

             준계(濬系)와 영의계(令儀系)의 1930년대 이전 후손의 비문(碑文).행장(行狀).시장(諡狀)등에 기록한

             시조의 이름(諱)을 고찰.

    나. 영조 20년(甲子.1744)에 준계(濬)인 죽산안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씨족원류(氏族源流.조종운이

         1680년에 필사한 종합성씨보)를 보고 해당 계파를 베껴서 참고 하였다는 안상휘(安相徽)의 족보서문과
         1804년. 1922년. 1960년까지 濬을 시조로하는 족보를 4회 간행하였고..

         순조 5년(乙丑.1805)에 처음으로 간행한 영의계(令儀)의 죽산안씨는 안성흠(安聖欽)의 족보서문(序文)에

         시조를 令儀로한 족보를 1848년1858년,1893년,1949년,1965년까지 7회 간행하여왔다. 

    다. 두 죽산안씨 문중이 항간에 떠돌던『隴西李氏東來說』이나『죽산안씨 同源譜』를 두 문중이 1919년 이후

         일제강점하의 족보에, 또 가공인물인 안윤채가록(安潤彩家錄)이라 하면서 범례(凡例). 또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며 스스로 “믿지 못한다(尙難徵信)“라고 하였다.
         안윤채는 죽산안씨족보 어디에도 자손으로 이름이 없으니 가공인물이다.

    라. 또한,두 문중의 고려이후 조선조에 이름난 선조가 있고 그 개인의 행적기록을 보아도 중국 사람이나

         당나라 종실사람이 시조라는 기록이 전혀 없다. 

    마. 고려.조선조 때 전통사회에서 광주 안씨. 순흥 안씨.죽산안씨 간에 서로 결혼(結婚)으로 얽혀있음을 보면

         성씨만 같을 뿐 다른 계통임이 분명하다.

 

5. 맺는 말.

     
   가. 시대착오적인 모화사대사고(慕華事大思考)이거나, 동성동본(同姓同本)을 합치려는 궁색한 생각으로

        가공인물을 만들어 1976년에 족보를 합쳐 조작하고,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시조의 격(格)을 높여 조작한

        것을 믿으라고 강변하며 다른 安씨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는 행위와 【한국학중앙연구원】까지 압박을

        가하는 행위를 지탄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에 모든 성씨의 "성씨의 역사"를 삭제하였다). 

   

  나. 또 조작한 족보에 광주 안씨와 순흥 안씨의 시조. 선대를 같은 계통으로 기록하 였으니,

       근원이 전혀 다른 安씨(廣州 安씨. 順興 安씨)의 姓氏 根本을 侵犯한 범죄행위를 반성하고

       그 족보를 폐기함이 마땅하다.
 

★ 참고로 廣州 安씨 始祖 기록을 역사문헌에서 본다.     

​ 

    1. 廣州 安씨 역대 족보에 기록한 시조의 기록 原文

        仕高麗太祖官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拜大將軍 或云以州吏出顯.』

         ※.1738년 최초족보.1790. 1866. 1922. 1957.1983년 대동보까지 5회 간행에 동일한 기록..

   

    2. 蘇世讓(1486-1562), 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 1540년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 ...........
           ※. 陽谷先生集卷之十一 碑碣 [한국문집총간 권 23, p.464d] 

   

    3. [安] 姓氏: 廣州 "大將軍 安邦傑之後 邦傑以州吏顯"
                       順興 "其先 本興寧縣吏安子美 以吏追封 其後分爲三大族..."
                       竹山 "延興府院君安漢平之後" 

                       權文海(1534-1591), 大東韻府群玉 (1589년)
    

    4. 趙從耘(1607-1683), 氏族源流(筆寫編) : 1680년.
            "廣州安氏始祖安邦傑大將軍"

   

   5. 洪敬謨, 『重訂南漢誌』(1846),人物 : 권7, p.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p.241)  
         高麗安邦傑 州人作亂殺其主 邦傑 倡義討平之 又奏捷于平壤 麗太祖嘉其功 封廣陵君 賜籍廣州 爲安氏始祖
         廣州府邑誌(京畿道)에 동일한 기록임.[光武 3(1899) 頃寫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보기 인물 : p.26 ]


[한국성씨총람증보판]에 수록할 "廣州安氏" 기사. 성씨 역사

아래 자료는 [한국성씨총람증보판]에 '광주안씨 대종회'가 [광주안씨 성씨기사]로 제공하는데,

그중에 정정(訂正).보충(補充)할 내용을 글자로 수정표현하고, 적색글자는 삭제할 것을 표시하였다.

이는 [한국성씨연합회]가  정확하고 권위있는 '종합보학계보서'가 되어야 하므로 작업한 것이다.


※. 현재[한국성씨총람]에 수록된 기사는 1989년2월에 '중앙일보'가 간행한 [성씨의 고향]

     수록된 것을 그대로 광주안씨대종회의 都有司라는 安武鎭이 族史를 잘 알지못하고

     옮겨놓은 것이니 오류가 많고, 특히 竹山安氏의 僞譜(1976년 간행)를 引用한 것이어서

     크게 오류되었다.


현재의 [한국성씨총람]에 1417쪽~1430쪽까지.

 

 

 

광주안씨의 연원(廣州安氏淵源)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조에 대장군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기미보(己未譜) 이전의 구보에 대장군의 묘소가 광주의 갈마치에 있었다 하고. 혹은 개성부 동쪽 15리 지금의 장단군에 속해 있는 양안촌(兩眼村) 마을이 있다, 이곳에 광주안씨 시조의 묘가 있으며, 재궁(齋宮)이 있어 이름하여 안재(安齋)라 하였다 하나 지금은 미상이다. 기미보(1739:己未)의 별록(別錄)에 대장군 이하로, 중흥조(中祖)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겸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 안유(安綏)이상으로 13대의  휘함(諱啣)과 직명(職名)만 전하면서, 상세한 고증을 후대(後代)에 기대하였다. 이는 원주에 사는 안처대(安處大:1675-?.29세손.감찰공파후손)가 충주 위류면(忠州圍柳面)의 순흥안씨집에서 순흥안씨 간판구보(順興安氏刊板舊譜)1719년에 베껴와 한성의 안서우가(安瑞羽 家)에 傳한 것이 【12代 缺世謄錄인데 광주군(邦傑)을 시조로 하여 13(忠季)까지 기록이다. 사간공 안성(思簡公 安省)이 조선조초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보첩 3권이 있었는데 본문이 유실되고 서문만 전해 오고 있어 상대계보를 알 수 없어 유감이며, 1725. 1737년에 문중에서 안처대의 【등록】을 재확인이 안되므로 중조14세 휘 유()1세로 기록하고,[12대결세]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였는데,병인보(1866). 임술보(1922)의 사간공유사(휘省.思簡公遺事)의 기록(十七世仕前朝侍中八人學士七人云)과 안처대의 등록(謄錄)을 고찰하여 1922(임술보)에서 12대결대를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이어서 계해대동보(1983) 간행때에 종의(宗議)로 시조이하 세대를 연계(連系)하기로 결정하여 12대결대를 본기에 세우고 간행하였. 그 후 구보의 기록에 따라 두 차례 종의에서 아래와 같이 광주안씨 연원을 공포하고(2008), 광주안씨 유래를 정립하였다.(2015)

 

※. 수정 이유:

      광주안씨 시조 다음 '상대12대결세'는 안처대의 [12대결세 등록]으로 기미보(1739최초족보)의

      '별록(別錄)'에 기록한 것이며. 12대 계대(상대계보)를 본기(本紀)에 세운 경과(일이 이루어진 내용)

      를 조리있게 설명하고,

      순흥안씨 시조 子美가 10세 弘美선조의 弟로 기록된 것은, 순흥씨 출자(始祖 出自)에 대한

      것으로,

      순흥안씨의 족보와 1파.2파.3파大派와 대종회가 否定하는 것인데 광주안씨가 기록하는 것은 서로

      다툼이 다.

      또, 순흥안씨는 족보마다 '전의록(傳疑錄)'을 기록하여 를 强하게 否定하고 있다.

      안관(安灌)은 순흥3파의 후손으로 경남 함안에 거주한 사람으로, 그의 개인文集인 취우정실기

      (聚友亭實記)애매기록을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은 스스로 매우 경솔한 것이다.

      '광주안씨의 연원'은 성씨의 역사를 개괄(槪括)하는 매우 중요한 글이므로  전체문장을 수정함이

      마땅하다.

 

     '죽산안대동보.......각각 개명(改名)되었다 한다'까지를 삭제한다.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1417쪽부터 1418쪽까지,

 

백제 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서기전18년( 癸卯)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온조13년(서기전7년 乙卯)에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좋다하여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하여 남한성(南漢城)이라 이름하였다.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는데, 3백 76년을 지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辛未.371)도읍을 남평양(南平壤)에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멸한 후, 문무왕(文武王) 한산주(漢山州)로 고치고, 문무왕8년(庚午. 670.)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丁酉.757)에한주(漢州)로 고쳤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매, 신문왕(神文王)이 비로소 신라 경내(境內)의 사벌(沙伐)·삽량(歃良)·거열(居列)의 3주(州)와 백제의 옛땅 웅천(熊川)·완산(完山)·무진(武珍)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광주목(廣州牧)】이라하였다. 별호(別號)는 회안(淮安)이다.검단산(黔丹山)은 주(州) 동쪽에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일컫는다. 도미진(渡迷津)은 주(州) 동북쪽에 있으며, 나룻배가 있다. 그 서쪽을 진촌진(津村津)이라 하며,주(州) 북쪽에 있고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광나루)가 있다.州官衙는 지금의 河南市에 있었다.

특히, 성씨조(姓氏條)에 광주의 土姓으로 李. 安. 金으로 安씨가 있으니 광주안씨는 토착성씨이다.

조선 선조6(宣祖6:1577)에 부사(府使)를 두었다. 인조원년(仁祖元年:1623)에 류수(留守).부윤(府尹)을 두다가,14(1636)에 호란(丙子胡亂)으로 관아(官衙)를 남한성(南漢城)에 옮기고.류수 겸 수어사(留守 兼 守禦使)라 하였다. 그 후 부윤으로 되어 있다가 행정개편으로 1896년에 군()이 되고,군청은 지금의 광주시경안동에 있다. 1900년대에 일부가 서울로 편입되고,성남시(城南市). 하남시(河南市) 분리되어 현재는 8개 읍면(8個 邑面)이 남아, 광주시(廣州市)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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