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고려의 토성분정(土姓分定)과 본관제(本貫制).
-지방자치가 활발했던 때는 고려 시대 였다. 그러나 고려의 임금들이 마음이 넓어서 지방에 재량권을 대폭 이양한 결과 지방자치가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모두 29명의 왕비를 두었다. '고려사' 후비(后妃)열전에서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나주에서 빨래하던 여인 장화(莊和)왕후 오씨를 빼고는 모두 유력 가문 출신들이 었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에게 후한 예물과 함께 자신을 낮추는 글을 보내는 "중폐비사(重幣卑辭)" 를 통한 정략혼인의 결과로 부인이 많았던 것이다.
-태조는 재위 23년(940) 각 지역의 백성과 토지의 문적(文籍)을 작성하고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을 실시했다. 씨성(氏姓)이라고도 불리는 토성(土姓)의 '씨'와 '토'가 바로 본관을 의미한다. 유력 호족들에게 본관(本貫)을 줌으로써 그 지역의 지배권과 자율성을 인정해 준것이다. 왕건은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에서 소외된 지방 호족들을 규합해 고려를 건국했으므로 지방 호족연합정권이었다. 바로 이 호족들을 본관제를 통해 국가의 지배질서 속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 지역의 지배세력임을 국가에서 인정한 본관제 자체가 지방자치의 상징인 샘이다.
-'고려사' 지리지(地理志)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서울을 뜻하는 개성부(開城府)ㆍ경기(京畿)와 5도(道) 양계(兩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라 서북방의 서북계(西北界)와 동쪽의 동북계(東北界), 그리고 나머지 5도 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외에 계수관(界首官)이라는 특수한 지방조직이 있었다. 조선초 까지 존속했던 계수관은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을 뜻하는데, 관하에 영군(領郡)ㆍ영현(領縣)ㆍ속현(屬縣)을 갖고 있는 경(京)ㆍ목(牧)ㆍ도호부(都護府) 등을 뜻 하는 것이다. 고려 후기에 약 34개소가 있었는데, 도와 군현의 중간쯤 되는 지방조직이 었던 셈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사랑에서 발췌.
-지방자치가 활발했던 때는 고려 시대 였다. 그러나 고려의 임금들이 마음이 넓어서 지방에 재량권을 대폭 이양한 결과 지방자치가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모두 29명의 왕비를 두었다. '고려사' 후비(后妃)열전에서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나주에서 빨래하던 여인 장화(莊和)왕후 오씨를 빼고는 모두 유력 가문 출신들이 었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에게 후한 예물과 함께 자신을 낮추는 글을 보내는 "중폐비사(重幣卑辭)" 를 통한 정략혼인의 결과로 부인이 많았던 것이다.
-태조는 재위 23년(940) 각 지역의 백성과 토지의 문적(文籍)을 작성하고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을 실시했다. 씨성(氏姓)이라고도 불리는 토성(土姓)의 '씨'와 '토'가 바로 본관을 의미한다. 유력 호족들에게 본관(本貫)을 줌으로써 그 지역의 지배권과 자율성을 인정해 준것이다. 왕건은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에서 소외된 지방 호족들을 규합해 고려를 건국했으므로 지방 호족연합정권이었다. 바로 이 호족들을 본관제를 통해 국가의 지배질서 속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 지역의 지배세력임을 국가에서 인정한 본관제 자체가 지방자치의 상징인 샘이다.
-'고려사' 지리지(地理志)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서울을 뜻하는 개성부(開城府)ㆍ경기(京畿)와 5도(道) 양계(兩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라 서북방의 서북계(西北界)와 동쪽의 동북계(東北界), 그리고 나머지 5도 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외에 계수관(界首官)이라는 특수한 지방조직이 있었다. 조선초 까지 존속했던 계수관은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을 뜻하는데, 관하에 영군(領郡)ㆍ영현(領縣)ㆍ속현(屬縣)을 갖고 있는 경(京)ㆍ목(牧)ㆍ도호부(都護府) 등을 뜻 하는 것이다. 고려 후기에 약 34개소가 있었는데, 도와 군현의 중간쯤 되는 지방조직이 었던 셈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사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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