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안씨 시조의 연원과 出自를 고찰하고 표현하는데...종합검토 성씨 역사

우리 시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 모든 기록. 족보. 계보서 등에 시조의 姓名을 安邦傑이라고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 족보 이전 기록인 소세양공이 지은 우리 선조 (휘 潤孫.)의 신도비명에 시조는 고려 때 대장군이라 하였다.

○. 類書인 「대동운부군옥에 시조가 州吏였으며 대장군이라 하였다.

○. 족보에 고려초 태조 때 광주지방의 소요(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대장군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1400년대의 국가 편찬서 「세종실록지리지」에 廣州의 土姓으로 安씨가 있고,

     광주뿐만 아니라  북쪽을 제외하고 전국 각지 30여 군현에 安씨가 土姓. 亡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다른 기록에 통일신라 때에도 安씨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 순암공이 경술보를 스스로 편찬한 후 서문에 해당하는 보발문(譜跋文)에서

    "우리 안씨는 廣州를 본관으로 고려 초부터이다"라고 그 出自를 말 하였다.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史書에는 廣州 安씨의 출자를 적시하는  기록은 없다.

      반면에 문화 류씨. 벽진 이씨 시조의 경우는 그 출자를 증거할 기록이 있다.

◎. 고려 초에 일반 백성에게 君으로 책봉한 사실이 없으니 廣州君이라는 君號는 조선조 때 높여 부른 것이다.



★. 1738년 무오보(戊午譜)의 광주안씨최초족보 : 기미보(己未譜, 1739)라고도 함 

     高麗太祖初 邑人殺其州牧以叛 公倡義討平之以軍功 拜大將軍 封廣州君仍貫廣州

★. 1790년 경술보(庚戌譜)

     仕高麗太祖官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拜大將軍 或云以州吏出顯.

★. 순암공(안정복)이 경술보를 편찬하고 쓴 庚戌譜跋 첫 부분.

     吾安受姓廣州自麗初己然 而無大譜在古尙矣無徵

★. 世宗實錄地理志. 京畿 廣州牧 姓氏

     土姓三. 李. 安. 金. 加屬姓. 朴. 盧. 張. 此六姓, 據古籍及今本道關錄之, 其云加屬者. 古籍所書也, 後皆倣此.

     ☆. 내가 조사한 「實地」에 광주목 이외에 安山. 驪興. 利川. 陽智.忠州. 堤川. 長豊.秋溪(部曲).

          瑞興府(洞州). 金浦. 載寧. 平山. 兎山. 槐山. 竹山. 德泉. 瑞山地谷. 原州. 安康. 長耆. 東平. 禮安. 順興.

          基川(豊基). 玉泉. 六昌. 耽津. 昌平.함경도-翼谷. 永興. 등지에 토성.亡성으로 安씨가 있다.

★. 蘇世讓(1486-1562), 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 1540년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 ........... 

    陽谷先生集卷之十一 碑○碣 [한국문집총간 권 23, p.464d] 

    省(1344-1421) -- 鐵山 -- 克辨 -- 潤孫

★. 權文海(1534-1591), 大東韻府群玉 (1589년)

    [安] 姓氏: 廣州 "大將軍 安邦傑之後 邦傑以州吏顯" 

 

★. 서울 江東區歷史 (강동구 홈페이지)

     後三國을 統一한 고려태조왕건은 23년(940)에 지방행정 安定體制로 土姓分定을 시행한다. 土姓은 豪族내지 

     호족의 후예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本貫으로 하는 姓氏集團이다. 고려시대를 反影한 조선초기 

     [世宗實錄地理志] 廣州牧의 土姓이 李. 安. 金이다. 1871년 편찬한 廣州邑誌에 高麗때 인물로 安邦傑등이 있다.

★. 경기 河南市歷史 (하남시 홈페이지)

     河南市가 되기 전에까지 廣州郡이었다. 河南의 官籍姓氏는 廣州를 本貫으로 하는 姓氏로 가장 오래된 자료로 

    [世宗實錄地理志]의 姓氏條. [與地勝覽] 姓氏條에 廣州의 土姓은 李. 安. 金.이다. 廣州安氏始祖는 安邦傑인데 

     高麗初期 광주의 鄕吏로 광주에서 일어난 反亂을 平定하여 太祖로부터 광릉군에 봉해졌다.

 


★.역사학자들의 한국에서 성씨 출현에 관한 각종 서술 근거.

 [한국의 성씨와 족보] 이수건 영남대 역사학과교수 저서

Ⅰ.한국 성씨연구 序說

     3. 고려시대 지방통치와 군현제의 특징. 항목에서

    

     "첫째, 고려 사회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각 구획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을 각기 출신지, 거주지별로
      토성으로
분정하고 그 본관을 기초로 군현제를 발동시켜 한편에서는 새 왕조의 통치를 담당할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을
편제함과 동시에 군현제란 지방행정구획을 개편, 정비하여 점차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4. 중세 사회 지배세력과 土姓. 항목에서

 

        "태조 왕건의 군현 토성 책정은 일차적으로 반도 통일 후 논공행상을 겸한 신분제의 재편성이란 의도도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효율적인 지방통치체제의 재편성에 기본취지가 있었던 것이다."

         라고 토성책정 목적을 말 한다.

 

Ⅲ. 한국 성씨의유래와 고려 초기 土姓分定

      2. 고려 태조의 군현제 개혁과 土姓分定. 항목에서

      

      "후대에 나온 자료나 최근 국내외의 연구경향에서 왕건은 후삼국을 우선 통일하느라고 지방세력인 호족을

       회유하고 연합하는데 급급했고 실질적인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나 정책적 배려는 미쳐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며, 외관을 설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미비했던 지방제도는 광종.성종. 현종 대를 거치면서 고려왕조의 지방제도 내지 군현제가 정비되어
       갔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만 보고 싶지는 않다. 비록 자료상으로는 구체적인 사실이 나타나지 않지만, 태조 23년경을

       전후하여 후삼국통일 후 전국적인 지방통치체제 정비를 위한 획기적인 군현제 개편과 토성분정사업이
       성취됨으로써
상주외관 없이도 고려왕조의 지방통치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후삼국통일에서 외관이 정식 설치되는 성종 2년까지는 무려 47년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중앙정계에서는 빈번한 정권쟁탈전이 있었지만, 그렇게 강성했던

       지방 호족이 통일후에는 중앙정부에 순종하면서 이렇다 할 큰 반란이나 모역행위가 빈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라고 태조 왕건 23년경에 군현제와 토성분정사업이 정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그동안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각 읍 토성의 分定시기를 두고 오랜 고민 끝에 태조 23년(940)경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그 근거자료와 거기에 대한 저자의 논증 사실을 군현토성 분정문제와 결부하여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태조 23년 3월 주. 부. 군.현의 명칭을 개정했다고 『고려사』태조세가에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

            에서는 그 때 경주를 大都督府로 승격한 다음 諸州郡號를 개정했다고 했는데 이는 『고려사』 지리지의 내용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동사강목』에서는 그 해 주부군현호를 개정하면서 淸. 忠. 原. 廣. 公. 梁. 全. 光. 春州
            등의
주를 설치하고 그 나머지 군현도 개정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하 (2)~(5) 생략.

      

       (6) 태조 23년에 실시한 정책 가운데 도 중요한 것은 役分田의 제정이다.이는 바로 통일사업 완수 후 군현명칭 개정과

            구획개편, 각 읍사 구성원의 책정, 삼한공신의 등제 등 시책과 함께 신왕조 지지세력에 대하여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해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7) 토성의 분포지역과 토성이 없는 合屬縣과 未詳郡縣: 토성분정 시기를 태조 23년경으로 잡는 또 하나의 근거는
          
그 해 이전에 폐합된 군현에는 토성이 없으며, 또한 당시까지 토착씨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지역,

           즉 신라 말의 북쪽 국경선인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線의 이북지방에는 토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이하 생략.

     

      (8) 李重煥은 『擇里志』에서 우리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混一三韓. 始倣中國氏族. 頒姓八路= 반성팔로를 이수건교수는 토성분정으로 해석한다)

 

 
   아래와 같이 姓貫의 유래를 논술한다.또 이수건.이수환교수 공저의 논문: 
    [조선시대 신분사 관려 자료조작]에서 

     2. 姓貫의 유래와 조선후기 姓貫의식의 변화

         한국의 姓과 本貫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세종실록지리지(이하『실지라 함)의 각 邑 성씨조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한말까지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그 대신 『실지』를 축략․혼효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조선시대

         성관의 기본 자료로 인식되고, 성관의식과 보첩 편찬에 유일한 전거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성관의 원형이 상실되고

         말았다.

         중국식 성씨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왕실․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한국적 성관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초기였다. 후삼국시대의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재편성 과정에서 태조 왕건이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역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신분적 재편성을
단행한 성관체계가 뒷날 『실지』의 성씨조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실지』의 각 읍 성씨조에 의거 15세기 초에 존재했던 전국 성씨의 종류와 본관수의 성종별 통계자료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관상으로는 성씨가 기재된 縣 이상 주․부․군․현(속현․廢縣 포함)은 모두 544읍, 부곡은 110개,

         鄕 48개, 所 49개, 莊 9개, 處 5개, 驛 7개, 戍 3개소로서 향․소․부곡 등은 벌써 고려후기 이래 소멸의 과정을 밟아

         15세기 초에 와서는 거의 혁파되어 토착 성씨들이 유망했기 때문에 기재된 성관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任內로
         존속했던
고려 말 이전에는 각기 ‘土姓吏民’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실지』 소재 姓數는 대략 250성 안팎이며, 성관수는

        土姓이 2,079, 亡姓이 565, 來姓(亡來姓)이 381, 續姓이 565, 村姓(亡村姓)이 122, 入鎭姓이 404, 入姓(亡入姓)이 
        332,
賜姓․投化姓이 29, 합계 4,477 성관이었다. 『실지』 소재 이러한 성종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본관에 의한 구분 : 주․부․군․현성, 鎭姓, 村姓, 外村姓, 향․소․부곡․처․장성, 驛姓, 戍姓

         ㉡ 姓의 出自에 의한 구분 : 天降姓, 土姓․ 次姓․ 人吏姓․ 次吏姓․ 百姓姓․ 立州後姓․ 立縣後姓․ 加屬姓

         ㉢ 姓의 유망과 이동에 의한 구분 : 亡姓․ 亡村姓․ 京來姓․ 來姓․ 入姓․ 入鎭姓․ 亡來姓․ 亡入姓․ 續姓

         ㉣ 賜姓(賜貫)과 귀화성에 의한 구분 : 賜姓(賜貫), 唐來姓․ 向國入姓․ 投化姓

       『실지』소재 각 성이 딛고 선 본관은 어느 구획을 막론하고 기본적인 구성단위는 村이며,

         그 촌은 다시 邑治(治所․읍내)를 중심으로 내촌과 주위의 외곽촌 및 관내의 각종 임내로 구분되는 데서

         성의 종류도 인리성․백성성․촌성․임내성 등으로  분되었다.

         이상과 같이 고려초기 이래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했던 성관체제는 여말선초의 시대적 ․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및 소멸, 군현구획의 개편과 병합,
         폐합
등 각 姓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15세기 후반부터는 종래 세분된 본관이 점차
         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속현과 촌 및 향․소․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어 갔고

         속현․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듯이, 그 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15세기 초까지의 성관체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반영했던 『실지』 소재 속현․향․소․부곡․처․장․역․수․촌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 대부분이 그 소속
         읍을 새 본관으로 하게
되자 16세기 이후는 15세기까지 존속했던 각종 임내성이나 촌성이 거의 사문화되었다.

         이러한 사문화는 본관의 개변으로 인한 것이지 그 성 자체가 소멸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양반사회의 발달에 따라 문벌의식이 고조되자 미처 명조․현조를 받들지 못한 僻貫들이 기성의 명문거족에

         동화되기 위하여 본관을 바꾸는 改貫․冒貫 행위를 자행한 데서 재래 성관의 대대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鄭求福(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장. 한국고문서학회장 역임) 

저서. 고문서(古文書) 양반사회(兩班社會) 2002. 12. 30 초판발행. 一潮閣.

 제4절. 족보와 족보문화.

2. 姓氏의 개념과 유래.

(2). 성씨의 기원과 역사.  (241쪽)

.......한국에서 성씨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고려초에 있었다. 내란기를 통하여 신라의
골품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기반위에 성립한 고려왕조에서는 새로운 지배층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공헌한 지방의 호족 출신들에게 성을 내려 주었다.뿐만아니라 군.현을 개칭하면서 군.현마다 성을 분정하는 조처가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중국적인 성씨가 한국 성씨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광종이후 개경의 주요관직에 오른 사람은 각 군. 현에 분정한 성씨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있는 土姓으로 이해되고 있다......

李離和. 역사학자
한국사 이야기 ⑤ 2007. 8. 12..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


1. 민족통합의 새시대가 열리다.

  
제1부 난세를 헤치고 통일국가를 세우다.

      
공씨는 모두 공자의 자손(47쪽)

........왕건의 호족 회유정책은 940년 토성분정(土姓分定)과 본관제도(本貫制度)를

        실시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호족들에게 각기 성을 내리고 일정한 지역에서 집단으로 살게 한 것이다.

        토성들은 혈연성과 지연성을 인정받는다.

........고려 초가의 토성분정과 본관제도는 우리나라 성씨제도의 근본이 되었다.....



박종기. 역사학자. 한국사. 국민대 교수.

역사비평 (1998년 겨울) 2006. 10. 13.

 고려시대 다시보기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고려의 위치.

 

새로운 민족통합의 모델-본관제(347쪽)

.
....왕건은 외세의 개입없이 후삼국을 통합했다.

그는 통합후에도 지방세력의 기반을 해체시키지않고, 그들에게 성씨를 부여하고

그 근거지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자율적인 지배영역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을 사성(賜姓)정책 혹은 토성분정(土姓分定)정책이라 했다....

새로 쓴 500년 고려사.
제3장 민족통합모델 고려 왕조의 본관제
.

2. 본관제란 ?

 본관(本貫)은 다른 말로 성관(性貫)이라고도 한다. 이는 성의 출자지,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관을
사용하는 본관제가 나타난 것은 고려 초기부터이다.

 태조는 태조 23년(940), 공신들의 책정과 함께 토성분정, 역분전 지급, 군현개편 등의 일련의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본관제를 실시하였다.

 먼저 토성분정이란 ‘토’는 지역·지연의 의미이고 ‘성’은 혈연의 의미를 지니는데, 태조는 전국의 지방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여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한 편 지방사회를 국가의 지배 질서 속으로 편입시켰다.

 
이진한. 역사학자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저술 도서명:최승로. 고려의 기틀을 다진 현명한 재상.


항구적인 왕권 안정과 방책을 세우다.(204쪽)

....태조의 토성분정과 역분전의 실시.

    광종의 노비안검법 과 양전(量田). 과거제 등의 시행....



이덕일. 역사학자.

[역사자료]: 고려의 토성분정(土姓分定)과 본관제(本貫制).


-지방자치가 활발했던 때는 고려 시대 였다. 그러나 고려의 임금들이 마음이 넓어서 지방에 재량권을 대폭 이양한 결과
지방자치가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모두 29명의 왕비를 두었다. '고려사' 후비(后妃)열전에서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나주에서 빨래하던 여인 장화(莊和)왕후 오씨를 빼고는 모두 유력 가문 출신들이 었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에게 후한 예물과 함께 자신을 낮추는 글을 보내는 "중폐비사(重幣卑辭)" 를 통한 정략혼인의 결과로
부인이 많았던 것이다.

-태조는 재위 23년(940) 각 지역의 백성과 토지의 문적(文籍)을 작성하고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을 실시했다. 씨성(氏姓)이라고도 불리는 토성(土姓)의 '씨'와 '토'가 바로 본관을 의미한다.
유력 호족들에게 본관(本貫)을 줌으로써 그 지역의 지배권과 자율성을 인정해 준것이다
. 왕건은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에서 소외된 지방 호족들을 규합해 고려를 건국했으므로 지방 호족연합정권이었다. 바로 이 호족들을 본관제를 통해
국가의 지배질서 속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 지역의 지배세력임을 국가에서 인정한 본관제 자체가 지방자치의 상징인 샘이다.


종합 검토:

 ●. 우리 시조의 출자를  미화(美化)또는 과장(誇張)할 이유가 없고.
      한글세대가 알 수 있게 [광주 안씨 성씨 연원(성씨의 역사)]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역사서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근거가 없으나
      역사학자들이 연구결과로 정립한 [토성분정]설을 유의함이 타당하고,
      고려초에 성씨 출발을 설명하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의  定說이다.
      어떤 사람이 이를  폄훼하고 다른 말로 호도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없는 사실. 근거가 불분명한 것을 부풀리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좋은 표현으로 광주안씨의 [성씨연원]을 대종회에 건의하여
     인터넷 사이트 기사들을 고쳐 게시하게 할 일이다.
     수없이 비방하기보다 자기의 좋은 표현을 실현하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나의 案이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광주 안씨 성씨 연원을 표현함이 무리가 없다. 

[[광주(廣州)안씨의 시조는 안방걸(安邦傑)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 때 광주(廣州)지방의 유력한 세력을 가진 관리였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의 일부 사람들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지방안정과 통일에 공적이 있어 대장군(大將軍)의
직에 올랐다.

성(姓)을 갖게 된 유래는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던 형편과 같았는데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에 따라

안씨(安氏) 성을 스스로 갖게 되었고.

광주지방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추가:

내가 우리 광주안씨 시조가 安씨 姓을 갖게 된 내력을 고찰하는데,
고려시대 사회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백성들의 創姓을 설명하면서 고려 태조의 국가체제를
완성하는 대표적인 시책으로 사서에 명칭은 없으나 [토성분정]이라는 시책명칭을 창안하여 사용하는데
이수건교수가 처음 발표 하였으나 이어서 여러 역사학자들도 같은 개념으로 각자의 연구서에 사용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고려초 광종대에 과거제를 시행하는데 성씨와 계보를 권장하였으니 성씨와 본관제는 여러대에 걸쳐
발전해 왔음도 모르지 않다.
여러 역사학자들의 [토성분정]을 말하는 저술 사례를 드는데 "여러 학자 이름을 나열한다"고 비방하고.
광주 안씨 14세손 유(綏)공이 고려 중엽에 경상도 함안으로 이거(移居)하였으니 함안에 토성으로 안씨가
없다고 세종실록 지리지를 주요 근거로 한 토성분정설을 배척하는 것도 폄훼를 위한 억설이다.
분명한 근거기록으로 安吉祥이 광주안씨로 있는데도 족보에는 누락된 일은 무엇인가?
       
순흥안씨의 분적설이라 말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광주안씨 안처대가 1719년에 "12대 결세 기록 등초"한 것을광주안씨 내부에서 수차 확인하는 노력에도
결과가 없어 족보에 [별록]으로 기록하다가 1983년 대동보 간행 때에 본기에 편입한 것일뿐 광주안씨가
능동적으로 순흥이 광주에서 분적하였다고 한적이 없는데 마치 광주측에서 분적설을 말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다만 순흥이 스스로 [전의록]이라는 제목으로 부인하는데도 광주안씨측은 일체 공식적인 반응이 없다.
       
더구나 죽산안씨(구)가 시조를 날조하여 위보를 만든 것은 그 성격이
판이하므로 이를 언급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덧글

  • 강지승 2017/05/15 19:00 # 삭제 답글

    dlr이거 너무 많지 않음>? 학생들이 보기엔 좀 답답 해 좀 쭐여봐 그러면 얼마나 좋아? 다음부턴는 좀 줄여서 글싸 써 알겟어?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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