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康津)에서 죽산안씨 세적비문. 역사일반

죽산안씨의 비밀을 캐다

죽산안씨(竹山安氏) 세적비(世跡碑) 해석



안희 ‘전주판관’ 지내고 가선대부 한성판윤 추증

양광식 문사고전연구소장 “세적비는 죽고 없는 이들을 기록한 족보이므로 강진군에 단 한 벌 밖에 없는 보물”




0 비석은 강진읍 부춘산 아양동 죽산안씨 묘소 밑에 있다. 수년 전에 행문을 데리고 갔다 왔고 이번에는 참꽃이 만발한 4월 19일 찾아갔다. 크기는 83×177×17.5㎝이고 글자수는 32자 10행이며 년대는 신축 3월 안재(安梓)를 확인했다.

0 태천의 요청에 의하고 수암의 제물 준비와 감목의 사진촬영, 그리고 문중에서는 안경순, 필환, 준환, 규엽이 참여하여 큰 절 올린 후 탁본을 시작하였다.

0 그 결과 자(字) 호(號) 생년, 관직, 졸련, 배위, 묘소의 순서로 기록했으며 세적은 1세(世)부터 14세(世)까지의 발자취를 기록한 30인이 넘는 숫자였다.

0 그러나 석질이 사니암이어서 약한 부분이 풍우에 패어서 전체의 반절 정도만 판독하게 되었다.

0 비석은 거대하고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향토나 학술적인 내용이 많지 않아서 사료적 가치는 떨어진다. 안씨 문중에는 매우 귀중한 보물이니 보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 기왕에 조사한 일이라 류향좌목, 강진군지, 죽산안씨 족보 등 기타 자료를 뒤적여서 죽산안씨 보물의 실체를 벗겨보았다.



상계(上系)

0 상계는 시조, 그리고 6세 파조 안목(安牧-1360.5졸)인데 자가 익지(益之), 호가 겸재(謙齋), 봉작은 순흥군(順興君),시호는 문숙(文淑)이다.

0 그에게는 3형제가 있는데, 첫째 안원숭(安元崇)은 순성군(順城君), 둘째 안원형(安元衡)은 죽성군(竹城君), 셋째 안원린(安元璘)은 탐진군(耽津君)으로 분관되었다 한다.

세계(世系)

0 세계는 1세 안원형, 2세 면(勉), 3세 정생(挺生), 4세 을겸(乙謙), 5세 여주(汝舟), 6세 도(道), 7세 종손(終孫),8세 희(禧)로 이어진다. 희(禧)는 윤복(潤福)과 중복(重福) 형제를 두었다.

0 윤복은 형(珩), 세준(世俊), 충익(忠益), 수평(壽平), 처화(處和), 석창(碩昌), 기택(期宅), 식(栻), 명일(命一), 창수(昌洙)로 이어진다.

0 중복은 순(珣), 세신(世臣), 지택(之宅), 여지(汝止), 처구(處久), 재현(載賢), 국인(國仁), 봉경(鳳景), 명원(命元), 윤희(允禧)로 리어진다.

0 강진의 죽산안씨 7세 종손(1506-1614)의 묘소가 작천면 북적동(北績洞:상당)에 있으며 배위가 광산김씨 의효(義孝)의 여(女)인 것으로 보아 장흥에서 옮겨온 것 같다.

0 안종손의 아들인 희(禧1544-1614)는 벼슬을 하다가 을사(1605)에 내려와 아버지 묘 밑에 집을 짓고 귀래정(歸來亭)이라 이름을 지었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서울로 갔지만 1614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0 그 다음 해인 1615년 10월에 그의 아내 이천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강진읍 아양동(峨洋洞)에 묻었다.

0 안희의 두 아들인 윤복(1553-1615)과 중복(1565~미상)은 어머니 묘 밑에서 시묘살이를 한 후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것 같다.

0 비문에는 14세 처의(處義 1708~1756)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묘가 아양동 응봉하유좌원합폄이라는 내용과 맞다.

0 비문의 맨 끝줄에 신축(辛丑) 3월 일 재(梓 1809~1842)가 맞다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41년 3월에 세웠으니 금년 2013년이 172년째가 된다.



<족보의 비문>

0 족보 1권에 비문이 실렸는데, 1세 죽성군 안원형, 2세 쌍청당 면, 4세 사인 을겸, 5세 직장 여주(1640.10.2 건립), 6세 부사 도(1964. 2월 건립), 8세 판윤공 희배위 정부인 서씨 묘지문(1906. 2. 28)이 중요하다.

0 장흥에서 강진으로 와 안씨가 살게 된 것은 5세 여주의 큰아들 구(矩)는 장흥 건산(巾山)에 살았으며 후손은 무술에 통달했다. 둘째인 민(民)은 보성에 살았고, 후손은 문관과 무관의 생원진사가 많이 나왔다. 마지막인 도(道)는 장흥 상산리(霜山里)에 대를 이어서 살았고 도(道)의 3남 종손이 강진 죽산안씨의 입조이며 작천 북적동에 묘가 있다.



<이천서씨 묘지문>

0 이천서씨 묘지문은 1906년 2월 8일에 19세 안창수(安昌洙 1849~1908)가 지었다.

0 두 아들인 윤복(潤福)과 중복(重福)은 효우목인(孝友睦婣)이란 4글자를 침병(寢屛)에 써서 전가(傳家)의 적(蹟)으로 삼게 하고 시묘살이 하던 터에 재실(齋室)을 지었다.

0 또 부춘산 뒤에는 응봉(鷹峰)이 있으며 두 골짜기가 있는데 아양동(峨洋洞 높을 아, 높은 산아, 뛰어날 아, 높이 솟을 아, 의용이 엄숙하고 성대한 모양 아)과 안정지(安定池)라고 한다.

0 아양동은 죽산안씨 세장동(世葬洞)이요, 안정지는 안씨구기지재호(安氏舊基齋號)라 한다고 기록해 두었다.



<금석문>

0 강진에는 금석문이 별로 없는 편인데 있는 것은 사찰관련 자료들이다.

0 세적비는 죽고 없는 이들을 기록한 족보이므로 강진군에 단 1벌 밖에 없는 보물이요, 107년 된 정부인 서씨묘비문은 옛 마을인 아양동의 실체이니 부춘마을의 표징이라 할 수 있겠다.

0 비는 농대석(좌대) 비신, 가첨석(개옥)으로 되어 있다. 기록은 액서로 「죽산안씨세적비」라 했고, 전면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과 층간의 글자들이 마멸되었다. 게다가 뒷면은 온통 알아볼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0 다음은 류향좌목, 강지군지, 죽산안씨족보, 부춘유래, 재실, 4자전가, 기타의 순으로 알아본다.

<류향좌목>

0 1549년 1월 26일은 8세 안희, 1590년 10월 19일은 9세 안중복, 1599년 4월 14일은 10세 안형, 1626년 4월 19일은 11세 안세신이 적혀 있다.

(1967년 강진군지)

0 군지의 인물 분류는 사마, 문과, 무과, 사환, 증직, 봉군, 충절, 절의, 학행, 문행, 행의, 선행, 우애, 유림, 유안, 효자, 효부로 나누었다.

0 문과는 안희, 사환은 안순, 충익, 동수, 희수, 충절은 안순, 안형, 충익, 고년은 두환, 희수.

문행은 안형, 지태, 행의는 창수, 달준, 효자는 기택, 진휼은 동수 등이다.

0 그리고 명기편의 부춘은 죽산안씨와 해남윤씨이고, 성별세거는 부춘리와 대구면 용운에 판윤 안희의 후손이 산다고 했다.

<죽산안씨족보>

0 안윤복 계열은 효도에 안윤복(1563~1615) 안규남(1908~1981) 안경수(1928~ 1965)이고 효도·우애·학행은 안세준(1601~ 1674) 안창수(1849~1908) 학행은 안윤복, 안형(1584~1641) 안기택(1762~1832) 안인택(1765~1810) 안형택(1769~ 1815) 안영환(1887~1953), 행의는 안충익(1620~ 1711) 안명구(1891~ 1972) 안두환(1909~1968)이다.

0 안중복 계열은 효도에 안중복(1565~미상), 효도·우애는 안권(1799~1870), 효도·우애·학행은 안여천(1649~ 1713) 안종수(1739~1794) 안재신(1739~ 1787) 안시택(1761~1828), 학행은 안세신(1604~ 1679) 안지태(1637~ 1693) 안지로(1639~ 1698) 안여성(1686~ 1736) 안재협(1748~ 1809), 행의는 안순(1585~1648)이다.



<부춘유래>

0 부춘산은 후한 때 엄광(엄저릉)이 숨어 살던 곳이다. 그는 어릴 때 광무제와 함께 공부하였으며 왕위에 오르자 숨어 살았다.

0 이 사실은 19세 안창수(1849~1908)편에 있다.

0 효도와 우애가 타고 났고 선대의 사업을 잘 수행했다.

0 성리학을 해설하여 명백하게 하고 과거에 나가지 않고 덕행을 숨겼다.

0 엄자릉의 뜻을 수행한 것을 취하여 부춘산 밑에 정자를 짓고 동탄(桐灘)이라 이름을 붙였다.

0 밭 갈고 낚시하고 즐겨 도를 닦으며 자연을 벗 삼았다.

0 주희와 송시열 두 어진 이를 사모하여 유림들과 남강사를 고쳐 지었다.

0 그는 정부인 이천서씨 세장비문을 지었다.



<재실>

0 8세 안희는 귀래정이라 하고 두 아들인 9세 안윤복과 중복은 안정재(安定齋)라 하고 11세 안세준(1601-1674)은 영모재(永募齋)라 했다.

0 귀래(歸來)란 돌아온다는 뜻이며 7언시 두 구절을 남겼다.

강진에 내려옴, 세상을 바칠 뜻,

임금께 복종할 참마음 쌓는다.

心定下南終白髮 심정하남종백발

誠心拱北績丹衷 성심공북적단충

0 모친 이천서씨의 시묘살이를 한 안윤복과 중복은 그 터전에 집을 지어 안정재라 하니 안전하게 자리 잡게 함 또는 마음이나 일이 편안하게 정하여 진다는 뜻이다

0 영모재라 한 안세준은 효도와 우애, 그리고 학문과 품성으로 암행어사가 보고하여 묘지기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명현들의 필적을 모았다.

아양동 선묘 밑에 재사를 짓고 영모재(永募齋 : 영원히 사모함)라 했다. 덕행을 숨기고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장소로 삼으니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묘갈명과 유집이 있다.



<4자 전가>

0 강진의 죽산 안씨 가문에 대대로 전하게 당부한 4글자는 9세 안윤복과 중복의 유훈이다.

1615년 10월에 어머니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형제는 아양동 묘소 밑에 집을 짓고 살면서 효우목인(孝友睦婣) 4자를 써서 후손에게 남겼다.

그 뜻은 주례지관 대사도 두 번째 6행인 효도, 우애, 9족, 외친, 신의, 동정 중에서 앞의 4가지를 본땄으니, 어버이께 효도, 형제간에 우애, 9족 그리고 외친과 화목하라는 뜻이다.



<기타>

0 통혼(通婚)은 안윤복은 작천 박산에 살던 광산 김씨 남계순의 사위이고, 아들 형(1584-1641)은 성전 오산에 살던 함양 박씨 성란(成蘭)의 사위이다.

0 문집을 남긴 이는 11세 안세준과 안세신 그리고 17세 안권이다.

0 강진을 위해서는 12세 안지태(1637-1693)는 금릉청금록(金陵靑襟錄)을 최초로 지었고 3세 안여성(1686-1736)은 금릉객사(金陵客舍)의 집짓는 책임을 맡아 윤지서, 황일청 등과 함께 완성하고, 19세 안창수(1849-1908)는 남강사(南康祠)를 중건했다.


덧글

  • 2016/06/20 15:4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노송인 2017/10/30 13:05 #

    나는 (구)죽산안씨의 거짓족보를 고찰한 사람입니다.
    (신)죽산안씨, 즉 안원형이란 분이 시조라는 죽산안씨에 관해서는 작은 관심일뿐입니다.
    (신)죽산안씨가 순흥안씨에 족보에 들어가려는 일이 있다는 정도이지요.
    그러므로 특별히 "물맞이골"님이 광주안씨에 관하여 물어볼 일이 있으면 아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수(洙)자 항열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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