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씨총람증보판]에 수록할 "廣州安氏" 기사. 성씨 역사

아래 자료는 [한국성씨총람증보판]에 '광주안씨 대종회'가 [광주안씨 성씨기사]로 제공하는데,

그중에 정정(訂正).보충(補充)할 내용을 글자로 수정표현하고, 적색글자는 삭제할 것을 표시하였다.

이는 [한국성씨연합회]가  정확하고 권위있는 '종합보학계보서'가 되어야 하므로 작업한 것이다.


※. 현재[한국성씨총람]에 수록된 기사는 1989년2월에 '중앙일보'가 간행한 [성씨의 고향]

     수록된 것을 그대로 광주안씨대종회의 都有司라는 安武鎭이 族史를 잘 알지못하고

     옮겨놓은 것이니 오류가 많고, 특히 竹山安氏의 僞譜(1976년 간행)를 引用한 것이어서

     크게 오류되었다.


현재의 [한국성씨총람]에 1417쪽~1430쪽까지.

 

 

 

광주안씨의 연원(廣州安氏淵源)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조에 대장군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기미보(己未譜) 이전의 구보에 대장군의 묘소가 광주의 갈마치에 있었다 하고. 혹은 개성부 동쪽 15리 지금의 장단군에 속해 있는 양안촌(兩眼村) 마을이 있다, 이곳에 광주안씨 시조의 묘가 있으며, 재궁(齋宮)이 있어 이름하여 안재(安齋)라 하였다 하나 지금은 미상이다. 기미보(1739:己未)의 별록(別錄)에 대장군 이하로, 중흥조(中祖)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겸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 안유(安綏)이상으로 13대의  휘함(諱啣)과 직명(職名)만 전하면서, 상세한 고증을 후대(後代)에 기대하였다. 이는 원주에 사는 안처대(安處大:1675-?.29세손.감찰공파후손)가 충주 위류면(忠州圍柳面)의 순흥안씨집에서 순흥안씨 간판구보(順興安氏刊板舊譜)1719년에 베껴와 한성의 안서우가(安瑞羽 家)에 傳한 것이 【12代 缺世謄錄인데 광주군(邦傑)을 시조로 하여 13(忠季)까지 기록이다. 사간공 안성(思簡公 安省)이 조선조초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보첩 3권이 있었는데 본문이 유실되고 서문만 전해 오고 있어 상대계보를 알 수 없어 유감이며, 1725. 1737년에 문중에서 안처대의 【등록】을 재확인이 안되므로 중조14세 휘 유()1세로 기록하고,[12대결세]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였는데,병인보(1866). 임술보(1922)의 사간공유사(휘省.思簡公遺事)의 기록(十七世仕前朝侍中八人學士七人云)과 안처대의 등록(謄錄)을 고찰하여 1922(임술보)에서 12대결대를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이어서 계해대동보(1983) 간행때에 종의(宗議)로 시조이하 세대를 연계(連系)하기로 결정하여 12대결대를 본기에 세우고 간행하였. 그 후 구보의 기록에 따라 두 차례 종의에서 아래와 같이 광주안씨 연원을 공포하고(2008), 광주안씨 유래를 정립하였다.(2015)

 

※. 수정 이유:

      광주안씨 시조 다음 '상대12대결세'는 안처대의 [12대결세 등록]으로 기미보(1739최초족보)의

      '별록(別錄)'에 기록한 것이며. 12대 계대(상대계보)를 본기(本紀)에 세운 경과(일이 이루어진 내용)

      를 조리있게 설명하고,

      순흥안씨 시조 子美가 10세 弘美선조의 弟로 기록된 것은, 순흥씨 출자(始祖 出自)에 대한

      것으로,

      순흥안씨의 족보와 1파.2파.3파大派와 대종회가 否定하는 것인데 광주안씨가 기록하는 것은 서로

      다툼이 다.

      또, 순흥안씨는 족보마다 '전의록(傳疑錄)'을 기록하여 를 强하게 否定하고 있다.

      안관(安灌)은 순흥3파의 후손으로 경남 함안에 거주한 사람으로, 그의 개인文集인 취우정실기

      (聚友亭實記)애매기록을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은 스스로 매우 경솔한 것이다.

      '광주안씨의 연원'은 성씨의 역사를 개괄(槪括)하는 매우 중요한 글이므로  전체문장을 수정함이

      마땅하다.

 

     '죽산안대동보.......각각 개명(改名)되었다 한다'까지를 삭제한다.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1417쪽부터 1418쪽까지,

 

백제 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서기전18년( 癸卯)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온조13년(서기전7년 乙卯)에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좋다하여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하여 남한성(南漢城)이라 이름하였다.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는데, 3백 76년을 지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辛未.371)도읍을 남평양(南平壤)에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멸한 후, 문무왕(文武王) 한산주(漢山州)로 고치고, 문무왕8년(庚午. 670.)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丁酉.757)에한주(漢州)로 고쳤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매, 신문왕(神文王)이 비로소 신라 경내(境內)의 사벌(沙伐)·삽량(歃良)·거열(居列)의 3주(州)와 백제의 옛땅 웅천(熊川)·완산(完山)·무진(武珍)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광주목(廣州牧)】이라하였다. 별호(別號)는 회안(淮安)이다.검단산(黔丹山)은 주(州) 동쪽에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일컫는다. 도미진(渡迷津)은 주(州) 동북쪽에 있으며, 나룻배가 있다. 그 서쪽을 진촌진(津村津)이라 하며,주(州) 북쪽에 있고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광나루)가 있다.州官衙는 지금의 河南市에 있었다.

특히, 성씨조(姓氏條)에 광주의 土姓으로 李. 安. 金으로 安씨가 있으니 광주안씨는 토착성씨이다.

조선 선조6(宣祖6:1577)에 부사(府使)를 두었다. 인조원년(仁祖元年:1623)에 류수(留守).부윤(府尹)을 두다가,14(1636)에 호란(丙子胡亂)으로 관아(官衙)를 남한성(南漢城)에 옮기고.류수 겸 수어사(留守 兼 守禦使)라 하였다. 그 후 부윤으로 되어 있다가 행정개편으로 1896년에 군()이 되고,군청은 지금의 광주시경안동에 있다. 1900년대에 일부가 서울로 편입되고,성남시(城南市). 하남시(河南市) 분리되어 현재는 8개 읍면(8個 邑面)이 남아, 광주시(廣州市)로 승격하였다.


廣州安氏 世系圖(광주안씨 세계도)1418쪽

一世 二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 十一世 十二世 十三世

邦傑國信礪仲輔平憲思武成慶立石昌弼夢弘美益相學成忠季─┐

                                                                                               “子美順興安氏 始祖 '를 삭제할 것.

 

※. 수정이유: 순흥안씨대종회가 광주안씨 광주안씨 12세 弘美의 아우(弟)가 아니고,

                    그 시조출자(始祖出自)를  順興의 土姓으로 확인하고있다. 

 

 


주요 세거지(主要 世居地) :1420쪽

 

한편, 조선 최초 청백리에 녹선(錄選)19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후손들을 사간공후((思簡公后)로서, 한성(漢城)에서 살다가 20세 주부공파(主簿公 安鐵關)는 충북(忠北) 진천(鎭川)과 괴산(槐山)의 청안(淸安), 광주군의 고읍(古邑)웅천(熊川)당진(唐津)의 고대(古垈)에 살았으며, 20세 서령공파(署令公 安鐵山)의 후손도 22세 안식(安湜. 司贍寺直長)까지 한성에서 살다가, 23세 안승효(安承孝)가 전북 장수(全北 長水)로 옮겨 세거하였고,  , 양주 백석,연곡(白石,蓮谷)창녕군의 영산(靈山)춘성(春城)광주(廣州)감천(甘泉)에 옮겨 살고,24세 안사언(安士彦)과 그의 아우들도 한성에서 살다가 그의 후손들은. 광산(光山)보령(保寧)청양(靑陽)전주(全州)김해(金海)함안(咸安)남원(南原)서천(舒川) 비인(庇仁)서산(瑞山)홍성(洪城)부여(扶餘)괴산(槐山)문경(聞慶)상주(尙州)의성(義城)안동(安東)곡성(谷城)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한편 계해보(癸亥譜)”22세 안한손(安漢孫)이 광주(廣州)에서 경북 예천(醴泉) 일대로 이거 했다고 나타나 있고, 아들 안자온(安子溫)의 대에 상주(尙州)에 일부가 옮겨가 10여 대를 세거하였다. 20세 감찰공파(監察公 安從生)의 후손은,  24세 안지(安智)로부터 2대에 걸쳐 경기도 강화(江華), 충남 공주부여(公州扶餘)에도 살게 되었고.24세 여경(汝敬)부터 28세 신행(信行)까지는 한성(漢城)에서 살았는데, 그 후대에서 광주(廣州)의 덕곡(德谷)부여군의 온산(溫山)청주(淸州)남원(南原)당진(唐津)서천(舒川)나주(羅州)덕산(德山)영암(靈岩)시흥(始興)파주군(坡州郡)의 문산(汶山)에 살았다. 또한 21세 안팽조(安彭祖)의 후손들은 안동(安東)의 하회(河回)에서 살았으며 21세 안팽명(安彭命)의 후손들은 24세 안극충(安克忠)의 후손들이 전북 남원군(南原郡)의 보절(寶節), 24세 안극영(安克永)의 후손은 광주군(廣州郡)의 도척(都尺), 24세 안극효(安克孝) 후손은 당진(唐津)의 석문(石門), 24세 안극제(克悌) 후손은 보은군(報恩郡)의 금굴(金堀)에 각각 이거 하여 정착하였다. 

 

사간공 안성(安省)의 후손들의 세거지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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