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죽산안씨의 거짓족보를 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提示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구)죽산안씨. 순흥안씨. (신)죽산안씨 등이 시조의 기록을 두고, 갈등하는 행태에 엄정하게 대하지못하고, 모-든 성씨의 시조의 연원(淵源)을 삭제하여 [성씨본관사전]을 훼손하여  한국학분야를 스스로 부족하게 하였음을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을 보여주었으므로, 그 피해를 당하는 광주안씨 사람으로 (구)죽산안씨의 족보를 고찰하여 그 실상을 다시 밝히고자 여기에 기타의견으로 게시하는 것입니다.

 

아래는 (구)죽산안씨 족보(1976.1999 대동보)의 진위(眞僞)를 고증한 글임.

개요.

종래의 두 竹山 安씨(구죽산 안씨. 安濬 또는 安漢平을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 安令儀를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가

濬계는 최초족보를 1744년,1804, 1922,,1960년에 간행하고 일관되게 濬(고려 중기.少府少監)을 始祖로.

令儀계는 최초족보를 1805년,1848,1858, 1893,1949,1965년에 간행하며 역시 令儀(고려 중기.尙書左僕射)를

始祖로.

각각 竹山安씨로 살아온 성씨문중으로 그 족보와 각종 系譜書와 그 후손들의 墓碑文.行狀 등에도 분명하다.
 

그런데 1976년에 중국의 롱서이씨(隴西 李氏) 이원(李瑗)이라는 唐나라사람이 東쪽 松嶽山(開城 송악산)아래로

건너와 신라 경문왕때 왜란(倭亂)을 평정한 공으로 성(姓)을 安씨로 받고 그 아들 李枝春이 安邦俊으로 이름을

바꾸어 始祖가 되고 竹山君이라면서 濬계와 令儀계 두 죽산안씨가 하나로 합쳐 족보(合譜)로 [竹山安氏大同譜]를

만들어 하나의 죽산안씨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원(李瑗)의 세 아들(李枝春. 李葉春. 李花春)도 각각 安邦傑. 安邦俠으로 그 아들 3형제가 성(姓)을 받고,
이름을 바꾸어 한국의 모든 안씨(安氏)들의 始祖라고 하고, 廣州安씨 시조인 安邦傑과 10대까지.또 順興安씨

시조 子美를 광주안씨 10대 후손으로 系代를 써놓았으니 광주안씨. 순흥안씨가 모두 죽산안씨와 같은 계통(系統)

으로 그 족보에 기록하여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安씨의 성씨근원(姓氏根源)을 모독하고 있다.  

 
이어서 불과 22년만인(통상 30년주기로 족보를 간행하는데) 1999년에 다시 대동보를 만들면서 이원(李瑗)이

중국 당나라(唐)의 종실사람(宗室人.당나라를 세운 唐 高祖 李淵의 일가붙이)라고 신분을 바꾸고,

역시 같은 시조로 [竹山安氏大同譜]를 만들었다.
 

 

 

이에 姓氏의 출자(出自)와 근원(根源)에 한 점 관련없는 광주안씨(廣州 安氏)시조와 계대를 죽산안씨에

끼워붙여놓아 시조를 모독하고 전체 후손의 씨족 정체성을 부정. 모욕하는 사실에,

죽산안씨 족보와 그 씨족관련한 역사사실을 고증(考證)하고 최근 족보(1976.1999 대동보)가 거짓임을 밝힌다.

 

★. 고찰한 근거문헌.

     가. 죽산 안씨 족보: 1976(丙辰)죽산안씨대동보. 1999(己卯)죽산안씨대동보.

                                 1917(丁巳)죽산안씨세보. 1923(癸亥)죽산안씨세보.

     나. 역사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사. 동사강목. 신당서. 자치통감.

     다. 죽산안씨측 자료: 안씨원류(죽산안씨대종회.‘05.8.27.)

                                  죽산안씨대종회보 7.8.10호(‘00.3월.’00.12월.‘05.5월)

                                  죽산안씨측이 주장하는 고증자료(‘07.4.8.죽산안씨 대종회장 안국승씨 제공).

     라. 성씨종합계보서: 씨족원류(조종운.1680년찬). 조선씨족통보(윤창현.1924년)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한국족보대전. 성씨의 고향.

     마. 백과류서(百科類書): 대동운부군옥(권문해.1589년찬). 증보문헌비고(1908).


 1. 죽산 안씨 시조의 선계와 시조라는 인물은 날조한 가공인물이다.

    
    가.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先系)라는 이원(李瑗)이 농서(隴西)이씨(李氏)로 당나라(唐) 종실사람(宗室人)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는데,

         이국정의 아들은 이기(李錡). 이일(李鎰). 이풍기(李豊器). 이풍사(李豊士) 로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국정이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에 이국정의 진중에 군량이 없다고 수하장수 왕진(王振)에게 당 보응 원년

        (唐 寶應 元年.762)에 죽임을 당할때 두 아들 (풍기. 풍사)도 같이 죽었다..

        (乙丑,河中軍亂,殺李國貞及其節度使荔非元禮:신당서 기록)

         이국정의 큰 아들 이기(李錡)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로 당 헌종(憲宗)황제에 항거한 죄로 元和2년(807.

         丁亥).11월 11일에 당나라 도성인 장안(長安) 흥안문 성밖에서 그의 아들 이사회(李師回)와 함께 허리를

         꺾어죽이는(腰斬)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이기의 나이 67세 때다.(李锜,淄川王孝同五世孫。以父國貞蔭調鳳翔府參軍. 

        (帝曰:「爾以宗臣為節度使,不能斬子良然後入朝邪?」锜不能對。以其日與子師回腰斬於城西南,年六十七。屍數日,

         帝出黃衣二襲,葬以庶人禮。:신당서 叛臣上)

         이국정의 둘째 아들 이일(李鎰)은 이국정과 그 윗대 선조인 신통(회안정왕 神通)이 당나라의 개국공신이라

         제사를 받들도록 용서를 받았다.

          ※.新唐書: 열전 제3.宗室. 열전 제149上. 叛臣 上. 자치통감: 唐紀53. 참조.

     나. 죽산안씨대동보(1999년)에 그 시조의 아버지가 이원(李瑗)이고 아우는 이황(李璜)인데 두 사람은 당나라

          종실사람 이국정의 아들이라 하는데 당나라 종실세계(宗室世系)에 없는 사람을 날조(捺造)한 것이다.

          ※.신당서 卷70 上. 表제10上. 宗室世系 上. 참조.

     다. 이황(李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시조이고. 고려 덕종(1033). 문종(1063)때 사람으로 당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고려사 권5. 세가5. 고려사권8. 세가8. 고성 이씨 족보. 참조.

     라. 이원이 당나라 종실사람도 아닐뿐더러 가공인물이니 그의 세 아들이 있다는 것은 날조한 것이다.

 

 2.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와서 전공(戰功)이 있고 安씨가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가. 이원. 이황이 당 헌종 원화2년(丁亥.807)에 동쪽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 송악산 아래에 살았다는데,

         가공인물이 어찌 올 수가 있는가?
         807년에는 당나라 종실사람 이기가 처형을 받아 죽은 해다.

    나. 이원과 이황이 광주(廣州)사람이 그 성주를 죽이는 민란이 일어난 것을 토평하는 전공으로 신라 국왕이

         이원에게 안씨(安氏)姓을 주고 이황은 이씨 성을 갖게 하고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했다면서 그 근거로,

         신라 헌덕왕 7년(815)의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된 지역은 서쪽 변두리지역이니 開城이나 광주(廣州)가

         아닐뿐더러 이원이나 이황이 평정했다는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7년조 .참조.

    다. 헌덕왕14년(822)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기록을 이용하여 이원 이황이 전공(戰功)이 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지역은 지금의 공주(公州)지역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이었고 당시 한산(漢山.)은 지금 광주(廣州)로 스스로 지켰고,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의 인물기록

         등이 자세하여 이원이나 이황은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 14년조. 참조.

    라. 또, 헌덕왕 때에 백성에게 姓을 주었다는 기록과. 봉군(封君)한 사실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없다.


3. 이원의 세 아들이 전공(戰功)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改名), 봉군(封君)받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가. 신라 경문왕 4년(甲申.864)갑신왜란(甲申倭亂)에 왜구를 소탕한 공으로 이원의 세 아들이라는 지춘(枝春)은

        방준(邦俊).엽춘(葉春)은 방걸(邦傑).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이름을 바꾸고.죽산군(竹山君).광주군

        (廣州 君). 죽성군(竹城 君)으로 봉군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4년에 왜란이 없으며, 경문왕 재위14년 동안에도 왜란이 없었으며. 당시에 죽산.광주.죽성

        이라는 지명(地名)이 없었고, 일반 백성에게 봉군(封君)하는 일이 없었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문왕 4년조 내지 경문왕조 전부. 참조.

   나. 앞서 고증한 대로 중국 당나라 종실사람이라는 이원이 없으니 그 자식이라는 세 사람도 허구인물이다.

   다. 신라 때 성을 왕이 준(賜姓)일은 신문왕 3년(683)에 보덕왕 안승(安勝)에게 김씨(金씨)를 준 일.

        애장왕 6년(805)에 왕의 어머니를 숙씨(叔씨)로 당 나라가 준 일. 이외에는 없다.

   라. 죽산 안씨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빙자하나 1908년 당시에 떠돌던 항간의 낭설을 기록한 것일 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없으니 거짓이다.

   마. 특히, 광주 안씨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출자(出自)와 성씨연원(姓氏淵源)을 모방(模倣)하고 도용(盜用)하여

        거짓족보(僞譜)를 만든 것이다.


4. 종전(1976년 이전)에는 죽산 안씨는 두 문중으로 시조가 濬. 令儀로 각각이고. 족보가 따로 있다.

     
    가.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는 준(濬. 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두 죽산안씨 문중은 1744년.1805년에 각각 처음 족보를 간행하며 분명하게 따로 계대를 이어왔음이

         그들의 족보 기록과 각종 성씨계보 문헌에 확실하 다.

         ※.죽산안씨세보(1917.1923.). 씨족원류. 대동운부군옥.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참조.

             준계(濬系)와 영의계(令儀系)의 1930년대 이전 후손의 비문(碑文).행장(行狀).시장(諡狀)등에 기록한

             시조의 이름(諱)을 고찰.

    나. 영조 20년(甲子.1744)에 준계(濬)인 죽산안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씨족원류(氏族源流.조종운이

         1680년에 필사한 종합성씨보)를 보고 해당 계파를 베껴서 참고 하였다는 안상휘(安相徽)의 족보서문과
         1804년. 1922년. 1960년까지 濬을 시조로하는 족보를 4회 간행하였고..

         순조 5년(乙丑.1805)에 처음으로 간행한 영의계(令儀)의 죽산안씨는 안성흠(安聖欽)의 족보서문(序文)에

         시조를 令儀로한 족보를 1848년1858년,1893년,1949년,1965년까지 7회 간행하여왔다. 

    다. 두 죽산안씨 문중이 항간에 떠돌던『隴西李氏東來說』이나『죽산안씨 同源譜』를 두 문중이 1919년 이후

         일제강점하의 족보에, 또 가공인물인 안윤채가록(安潤彩家錄)이라 하면서 범례(凡例). 또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며 스스로 “믿지 못한다(尙難徵信)“라고 하였다.
         안윤채는 죽산안씨족보 어디에도 자손으로 이름이 없으니 가공인물이다.

    라. 또한,두 문중의 고려이후 조선조에 이름난 선조가 있고 그 개인의 행적기록을 보아도 중국 사람이나

         당나라 종실사람이 시조라는 기록이 전혀 없다. 

    마. 고려.조선조 때 전통사회에서 광주 안씨. 순흥 안씨.죽산안씨 간에 서로 결혼(結婚)으로 얽혀있음을 보면

         성씨만 같을 뿐 다른 계통임이 분명하다.

 

5. 맺는 말.

     
   가. 시대착오적인 모화사대사고(慕華事大思考)이거나, 동성동본(同姓同本)을 합치려는 궁색한 생각으로

        가공인물을 만들어 1976년에 족보를 합쳐 조작하고,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시조의 격(格)을 높여 조작한

        것을 믿으라고 강변하며 다른 安씨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는 행위와 【한국학중앙연구원】까지 압박을

        가하는 행위를 지탄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에 모든 성씨의 "성씨의 역사"를 삭제하였다). 

   

  나. 또 조작한 족보에 광주 안씨와 순흥 안씨의 시조. 선대를 같은 계통으로 기록하 였으니,

       근원이 전혀 다른 安씨(廣州 安씨. 順興 安씨)의 姓氏 根本을 侵犯한 범죄행위를 반성하고

       그 족보를 폐기함이 마땅하다.
 

★ 참고로 廣州 安씨 始祖 기록을 역사문헌에서 본다.     

​ 

    1. 廣州 安씨 역대 족보에 기록한 시조의 기록 原文

        仕高麗太祖官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拜大將軍 或云以州吏出顯.』

         ※.1738년 최초족보.1790. 1866. 1922. 1957.1983년 대동보까지 5회 간행에 동일한 기록..

   

    2. 蘇世讓(1486-1562), 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 1540년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 ...........
           ※. 陽谷先生集卷之十一 碑碣 [한국문집총간 권 23, p.464d] 

   

    3. [安] 姓氏: 廣州 "大將軍 安邦傑之後 邦傑以州吏顯"
                       順興 "其先 本興寧縣吏安子美 以吏追封 其後分爲三大族..."
                       竹山 "延興府院君安漢平之後" 

                       權文海(1534-1591), 大東韻府群玉 (1589년)
    

    4. 趙從耘(1607-1683), 氏族源流(筆寫編) : 1680년.
            "廣州安氏始祖安邦傑大將軍"

   

   5. 洪敬謨, 『重訂南漢誌』(1846),人物 : 권7, p.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p.241)  
         高麗安邦傑 州人作亂殺其主 邦傑 倡義討平之 又奏捷于平壤 麗太祖嘉其功 封廣陵君 賜籍廣州 爲安氏始祖
         廣州府邑誌(京畿道)에 동일한 기록임.[光武 3(1899) 頃寫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보기 인물 : p.26 ]


덧글

  • 안성인 2019/08/31 06:07 # 삭제 답글

    죽산안씨는 경기도 죽주,죽산을 본으로
    성종때 대제학을 지내신 성현의 용재총화에
    순흥안씨와 죽산안씨는 거가대족이란 기록의 있습니다.
    선대가 의문인것은 어느집안이나 비슷합니다.
    광주노송인이 흥분하는것은 이해하나 상대가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것은 옳지않습니다.
    경기도 광주가 본이면 왜 조선초 성현같은 학자의 지식에는 없을까요?
    또한조선중기 대학자 우암송시열의 안방준행상에는 신죽산은 죽산 안전의 자손임이 명백한데도 신죽산으로 된것은 잘못된것입니다.
    조선말 나라가혼란할때 만들어진 족보등은 과장된것이 많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신분세탁이 많은것입니다.
    제가 광주안문을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없는가문이라고
    비난하면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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